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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지정문화재
한개마을에는 75채의 가옥이 있으며, 이 가운데 교리댁(校理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3호), 응와종택(凝窩宗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寒洲宗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5호), 월곡댁(月谷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6호), 진사댁(進士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24호), 도동댁(道東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32호), 하회댁(河回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76호), 극와고택(極窩古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77호), 첨경재(瞻敬齋, 문화재자료 제461호), 삼봉서당(三峯書堂, 문화재자료 제463호) 등 모두 10점의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다.

교리댁 (校理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3호
교리댁의 택호는 창건주 이석구(李碩九)의 수혼인 이귀상(李龜相)이 홍문관(弘文館) 교리를 역임하여 붙여진 이르으로 자연지형(自然地形)의 경사(傾斜)를 다라 마을안길을 올라가면, 돌담이 둘러진 대문채의 모습이 언덕길을 따라 높이 위치하기 때문에 매우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준다.
가전(家傳)에 의하면 이 가옥은 1760년경에 창건되었다 하며, 창건주 이석구는 영해부사(寧海腐使)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儀)등을 역임하였다. 이 주택은 6백여평의 대지위에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동의 건물이 독립배치되어있다. 넓은 대지 위에 정면7칸, 측면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인 사랑채를 비롯하여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ㅡ’자형의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口’자형으로 배취되어 있음은 이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는 태백산맥 일대의 ‘口’자형과 남부‘ㅡ’자형 민가를 섞어놓은 배치형식으로 생가되며 민가 유형의 지역간 전파, 교류, 절충 등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중요한 유산이다.

한주종택 (寒洲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
한주종택은 전통마을인 한 개마을의 가장 위쪽인 영취산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李敏儉)이 창건하고 1866년 이진상(李震相)이 중수한 건물로 지금의 집은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안주인이 상주의 동곽(東廓)에서 시집왔다하여 ‘동곽댁’이라고도 부르며, 유연한 풍정과 함께 집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고 고골목과 담장주위의 노송 드이 이루는 경관도 매우 인상적이다. 한주정사(寒洲宗宅)라는 정자가 있는 구역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주정사로 들어가는 대문은 남향,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동향이며, 정사와 안채를 구분하는 사잇담을 두고 작은 협문과 일각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였다.
특히 안채는 남향 ‘ㅡ’자의 정침과 좌측에 동향 ‘ㅡ’자 3칸의 고방채, 우측에 서향 ‘ㅡ’자 3칸의 아래채, 그리고 정침과 마주보는 남쪽에7칸 ‘ㅡ’자의 중문채 등 4동이 ‘튼口’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데, 한 개마을 가옥의 안채 배치 중 가장 완전하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적인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한주(寒洲) 이진상은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였으며, 그의 아들인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 손자인 삼주(三洲) 이기원(李基元), 백계(白溪) 이기인(李基仁) 등은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삼부자가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할 정도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월곡댁(月谷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호
월곡댁은 1911년에 이전희(李銓熙)가 처음 건립하였으며, 1930년경에는 사당을, 1940년경에는 별당채를 새로 추가하여 증축하였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에 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며 중문채 앞의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사당은 가장 뒤쪽에 독립된 구역을 이루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지은건물이면서도 각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도 ‘튼口’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등 이 마을의 공통된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이것은 민가 양식의 지역적인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면서도 기능적인 면을 충분히 배려한 것도 눈 여겨 볼만하다.

진사댁(進士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4호
진사댁은 안채 상량의 무오년(戊午年)이란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보면 정조22년(1798)에 이주진(李柱鎭)이 건립하였거나, 철종 9년(1858)에 이문상(李文相)이 건립한 가옥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립당시에는 예안댁(禮安宅)으로 불렸는데, 이문상의 부인인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예안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현 소유자의 선조인 이국희(李國熙)가 살림을 나면서 이 집을 매입·이주하였는데, 이국희가 1894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됨으로써 이후 가옥의 이름을 진사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민가 양식의 지역적인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면서도 기능적인 면을 충분히 배려한 것도 눈 여겨 볼만하다.

도동댁(道東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2호
도동댁은 조선 철종조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둘째아들인 민와(敏窩) 이기상(李驥相)이 살림집으로 1850년경에 건립한 것이다. 우측으로 난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의 좌측에는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 전면에 세워진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안마당의 좌측에는 고방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가옥을 처음 건립한 이기상(1829~1903)은 자를 치천(穉千), 호를 민와(敏窩)라 하였는데, 종형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쫓아 학문을 익혔으며, 생원시에 장원급제 후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역임하였다.
도동댁은 한 개마을의 전체적인 배치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배치형태가 튼‘口’자형으로서 지역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있다.

하회댁(河回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6호
하회댁은 전통마을인 한 개마을의 중심부에 남서향으로 위치한 조선후기 양반 주택으로서 소유자의 증조부가 구입하여 그 자손들이 살고있는 관계로 정확한 건립 연대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630년대의 건물로 추정된다.
당호(堂號)는 소유자의 모친이 안동 하회(河回)에서 시집온 데서 연유한다. 가옥의 배치는 ‘ㄷ’자형 평면의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에 ‘ㅡ’자형평면의 중문채가 튼‘口’자형의 배치를 이루면서 정침 우측으로 독립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정침이 흙담으로 분할되어 남녀 공간 구분이 확실하며, 그 사이에 협무을 내어 내외를 연결시키고 있다.
가옥에의 출입은 사랑채 전면 우측에 삼문을 통하여 사랑과 정침을 출입할 수 있도록 동선을 처리하고 있으나, 원래의 배치는 아니라 한다. 중문채 좌측으로 광이 독립적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무엌과 연결되는 뒷마당의 가사 노동 공간 특히, 토담으로 둘러쳐진 장독대의 단정함이 돋보인다.
대가족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 구성방법과 내외구분을 하면서도 상호 연결성을 도모한 배치방법이 독특하다. 한 개마을의 다른 가옥처럼 남부지역 반가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비록 부분적인 개조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극와고택(極窩古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7호
극와고택은 사랑채 묵서명(墨書銘)의 상량문을 통해 보면 조선 철종 3년(1852)에 건립된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이름을 극와고택이라고 명명한것은, 국권상실에 직면해서 소복을 입고 거실에 거적을 깔고 거처하며 두문불출한 극와(極窩) 이주희(李澍熙)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건립 당시 가옥의 배치형태는 안마당의 동쪽에 광채가 있어 ‘ㄷ’ 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광채가 철거되고 ‘ㅡ’자형의 사랑채와 정침만이 남아 ‘二’자형의 개방적인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반, 측면 1칸의 규모에 중앙 대청2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부엌 칸반, 안방 2칸, 우층으로 건넌방 1칸이 연속 배열 되어있다. 사랑채는 초가집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규모에 가운데 큰사랑방 2통칸, 사랑마루 1칸을을 연속배치 하고, 큰사랑방 좌측으로 작은 사랑방 1칸을 덧붙인 형태로 되어 있다.
극와고택은 사랑채가 초가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구성이 양반가옥의 주택에 필적할 만한 가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평면배치가 남부형 민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반가(班家)와 (民家)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첨경재(瞻敬齎)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1호
첨경재는 한 개마을의 두쪽 영취산(靈鷲山)불뫼동에 있는 여러 조상의 분묘를 “공경한마음으로 섬기는” 취지에 따라 건립된 것이다.
처음 건립된 이후 오랜시간이 경과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하여 창건 당시의 원형은 유지하고 있지 않으나 기념 건축다운 단순한 평면형태를 띠고 있으며, 한 개마을 성산이씨들의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종당(宗堂)으로 대대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응와종택(凝窩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이 가옥은 안채·사랑채·안사랑채·사당·북비채·대문채 등 모두 6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 살림집으로 경종 1년(1721) 처사(處士) 이이신(李爾紳)이 터를 잡은 곳이다. 집터는 조선 초기 성산이씨가 한개마을에 입향할 당시 종택이 들어섰던 자리이며, 대초당이라 하여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후손들이 모여 서책을 읽고 인격을 도야하기도 하는 등 마을의 발상지와 같은 장소였다.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순조 21년(18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고종 3년(186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굿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